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 || [youtube(Bc0i6G3g1fY)] || || 영화 [[명량]]의 오프닝 장면이다. ||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있으니 [[권율|도원수]]가 와서 이르길 "사태가 이에 다다랐으니,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라 하였는데, 대화가 사시(巳時)에 이르러도 대책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뢰어 내가 해안으로 가서 보고 듣고서 정하겠다고 하니 도원수가 기뻐하였다. 내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다다르니, 수령이 새로 부임하여 나아와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18일. [[칠천량 해전|칠천량에서의 처참한 대패]]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다시피 했다. 물론 물리적으로 박멸당한 것이 아니라 이리저리 무질서하게 도망친 것이었기는 하나 제대로 된 통제 아래에 모여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궤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이들이 이렇게 생존을 우선시한 덕분에 이순신의 복직 이후 도망쳤던 수군 병력들이 다시 결집하면서 조선 수군이 빠르게 복원되는 데에 보탬이 되었다.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한 [[선조(조선)|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하고 있던 [[이순신]]을 기존 자리였던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다. 사실 선조는 칠천량 해전 이후 대책이 이순신뿐임을 알았지만 이순신 복직을 내키지 않았다. 칠천량 패전이 보고된 이후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문제로 떠들썩했지만 결국 유일한 적임자는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이 언급되자 대답 없이 그 자리를 나가버렸고, 결국 남아있던 대신들이 복직을 결정했다. 나라가 절단날 상황에서도 선조는 이순신을 경계하고 질투하기를 끝내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돌아온 이순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체스터 니미츠 #s-2.2|그는 휘하에 전함 한 척 없는 이름만 있는 통제사였다.]] 더 심각한 건 이순신을 백의종군 이전의 계급이 아니라 더 낮은 계급으로 강등한 것이다. 즉 통제사라는 보직은 같지만 이순신 개인의 계급은 오히려 하락한 것.[* 현대의 군 체계로 따지면 해임되었던 해군 대장인 해군참모총장이 복직하는데 계급은 대장이 아닌 중장으로 복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휘하 수군 절도사들과 계급이 비슷해지는 바람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극상을 당할 수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칠천량 패전 이후의 위태로운 형세에서는 수군 절도사라도 하극상은 커녕 도망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도 벅찬지라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안 하고 뒤에서 팔짱을 끼며 구경만 하던 명나라 군까지 국가의 존망이 걸린 결전이 목전에 닥친 마당에 지휘계통을 어지럽히는 건 도대체 뭐 하는 짓거리냐고 선조를 시원하게 깠다. 그래서 계급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역시 영감으로 백의종군 이전보다는 낮았다. 원래는 정2품 대감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런 푸대접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조정에서 자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행동을 개시했다. 수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며 머무르고 있던 초계를 박차고 나와 각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장병들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들을 입수했다. 다행히 칠천량 해전 이후 곧바로 밀려들 것만 같았던 일본 수군이 남해안 장악 등에 신경쓰다가 8월에는 해상 작전에서 철수한 덕분에 시간도 어느 정도 생긴 상황이었다. 사실 일본군이 처음부터 원균을 무찌르고 진군한다고 생각했었으면 미리 진군 준비를 철저히 해놓았을 텐데, 일본군 입장에서는 칠천량 해전의 승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승리였기 때문에 진군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비유하자면 집에서 옷을 벗고 자던 도중 조선군의 기습을 맞아 싸우다가 자신들도 모르게 승리해 버렸기 때문에[* 사실 일본군은 칠천량 해전을 벌일 예정이 없었다. 원균이 함대를 띄웠다는 소식을 듣고 아직 원균이 어떤 놈인지 잘 모르던 왜군은 그 규모를 알아본 후 이전에 없었던 규모라는 것을 확인한 후 '드디어 우리가 죽나 보다.'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쌓아 놓은 모든 것을 총동원해 방어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부딪혀 보니 조선 수군의 실태는 참담하기 그지없었고, 다르게 말하자면 원균이 얼마나 조선 수군을 말아먹었는지 알 수 있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한참 걸린 다음 상황을 파악한 뒤에도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하느라 시간이 걸린 사이 이순신이 부활한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셈. 이때 이순신의 행적은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파일:attachment/beforeMyeongryang.jpg]] >7월 18일 >칠천량 전투의 소식을 듣다. 도원수 권율과 대책[* 전술했듯이 이순신을 복직한다는 교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권율이 찾아온 것이다. 즉 조선 내에서 이미 이순신을 대체할 인물이 없다는 사실이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을 의논하고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에 도착. > >7월 19일 >단성에서 숙박. > >7월 20일 >진주 굴동에서 이희만의 집에 숙박. > >7월 21일 >곤양을 지나 노량에 도착, 거제 현령 [[안위]] 등 패잔병을 수습. 거제현 소속 배 위에서 숙박. > >7월 22일 >경상 수사 [[배설(조선)|배설]]이 합류. 곤양에서 숙박. > >7월 23일 >진주 굴동으로 돌아와 이희만의 집에 숙박. [[배흥립]]이 합류. > >7월 24일 >이홍훈의 집에 숙박. 배경남이 합류. > >7월 27일 >손경례의 집에 숙박. 이후 이순신은 한동안 진주 굴동에 머무르다가 8월 3일 아침에 비로소 자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서를 받았다. 조정에서 22일에 칠천량 해전의 소식을 접하고 내린 교서가 비로소 도착한 것이었다. 선조실록에는 단지 이순신을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통제사로, 권준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는 짤막한 기록만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삼도 통제사 복직 교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왕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保障)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禍)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득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大軍)이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없어졌으니, 이후 바닷가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한산을 이미 잃어버렸으니 적들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초미(焦眉)의 위급함이 조석(朝夕)으로 닥쳐온 상황에서, 지금 당장 세워야 할 대책은 흩어져 도망간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배들을 거두어 모아 급히 요해처에 튼튼한 큰 진영을 세우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망갔던 무리들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한창 덤벼들던 적들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위엄과 은혜와 지혜와 재능에 있어서 평소에 안팎으로 존경을 받던 이가 아니고는 이런 막중한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 >생각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水使)로 임명되던 그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왔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 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謨策)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而尙致今日何敗言戰哉之辱也, '''尙何言哉! 尙何言哉!''') > >이제 특히 그대를 상복(黑衰)중에 기용하고 또 그대를 백의(白衣)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어루만져 주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형세를 장악하여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 번 떨치게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적들 또한 우리 편이 방비하고 있음을 듣고 감히 방자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 >수사(水使) 이하 모두 그대가 지휘하고 통제하되 만약 일에 임하여 규율을 어기는 자가 있거든 누구든 군법대로 처단하도록 하라. 그대가 나라를 위해 몸을 잊고 기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남은 이미 그대의 능력을 다 시험해 보아서 알고 있는 바이니, 내 어찌 감히 많은 말을 보태겠는가. 아! 저 육항(孫陸抗)[*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장수]이 국경의 강 언덕 고을을 두 번째 맡아서 변방의 군사 임무를 완수했으며, 저 왕손(王遜)[* 명나라 때 관리. 성품이 곧아 남의 모함에 빠져 귀양 갔다가 풀려나 복직되었음.]이 죄인의 몸으로 적을 소탕한 공로를 세웠던 것처럼, 그대는 충의(忠義)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나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바라면서, 이에 교서(敎書)를 내리는 것이니 생각하여 잘 알지어다. >---- >『이충무공전서』, 「상중에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를 제수하는 교서(起復授三道統制使敎書)」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 집권이 실현된 국가에서 왕이 신하한테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 자체가 파격이다. 요약하자면 '내가 모자라 네 관직을 빼앗고 너에게 벌을 줬다. 미안함에 할 말이 없다.'고 한 것이다. 조선 역사를 통틀어 임금이 신하에게 이렇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한 사례는 없다.[* '''더군다나 이순신은 모친상으로 인해 3년상 중이었다.''' 양반의 3년상 중에는 관직을 제수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물론 조선왕조에서는 여러 임금들이 그런 관례를 무시하고 총애하는 신하에게 막 관직을 제수하기는 했지만 3년상을 이유로 신하가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고 이럴 경우에는 딱히 관직을 강요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이순신의 모친이 사망한 것도 반은 선조 때문이다 보니 이순신이 3년상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함은 충분히 가능했기에 조정은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이 정도는 최소한도 안 되는 상황이다. 당장 이순신의 자당 본관과 백의종군하며 지낸 지명을 생각해 보자.] 선조와 이순신 모두 그만큼 [[사직]]의 존망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았기에 수군 없는 수군 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복직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하지만 선조는 전술했듯이 이 와중에도 품계를 제대로 돌려주지 않았는데, 파직당하기 전 이순신 장군의 품계는 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였으나 이때 돌려준 품계는 정3품 절충 장군으로 일반 수사와 품계가 같다. 현대 해군으로 가정하면 [[해군참모총장]]과 [[함대사령관]]이 계급이 같은 상황이다. >8월 3일 >새벽에 복직 교서가 도착. 권관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진주 굴동에서 이홍훈의 집을 출발하여 종일 움직인 끝에 구례에 도착. > >8월 4일 >곡성에서 숙박. > >8월 5일 >옥과에 도착. > >8월 6일 >옥과에서 숙박. 송대립 등이 일본군을 정탐. > >8월 7일 >순천으로 가던 중 패잔병으로부터 말 3필과 약간의 활과 화살을 탈취. 곡성 강정에서 숙박. > >8월 8일 >순천에 들어가 달아나려는 수령들을 잡고 방치된 군기를 처리. 순천에서 숙박. > >8월 9일 >낙안을 거쳐 보성 조양창에 도착, 이 과정에서 순천 부사 [[우치적]]이 합류. 김안도의 집에 숙박. > >8월 11일 >임란 초부터 보좌해왔던 [[송희립]]이 최대성과 함께 합류. > >8월 13일 >패전 직후 가족을 데리고 달아났던 경상우후 이몽구가 합류, 본영의 군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침. > >8월 14일 >장계 일곱 통을 송부. 보성에 도착, 열선루에서 숙박. > >8월 15일 >교지가 도착. 보성의 군기를 처리. > >8월 16일 >보성 군수와 군관 등을 보내 피난했던 관리들을 데려옴, 궁장인 지이와 태귀상 등이 들어왔고 김희방과 김붕만 등도 합류. > >8월 18일 >회령포에서 [[배설(조선)|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전선 10척을 입수하여 그나마 수군의 구색을 갖춤. 그나마 구색을 갖추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때 배는 모두 합쳐도 판옥선 13척에 초탐선 32척이 전부다. 이는 명량 해전 당시 동원했던 전선만 최소 330척에 이르던 일본군과는 숫자를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근래 또 배신(陪臣) 겸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전선과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거의 다하였습니다. 신은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더불어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1월 10일자 5번째 기사 비록 일본 수군의 주력인 세키부네들이 조선 수군의 판옥선에 비해 크기가 작았다고는 하지만 숫자 앞에는 장사가 없는 것이 전쟁에서는 엄연한 사실이다. 당시 왜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133척은 바다를 새까맣게 덮었다는 백성들의 증언과 다르기 때문에 선발대의 규모가 133이었다고 추정한다.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이나 조정 내에서 당장이라도 수백 척의 배가 들이닥칠 거라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당시의 조선 수군은 싸움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조정에서는 배도 없는데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합치자는 의견까지 나왔고, 선조 또한 이순신을 육전으로 돌리려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언급은 선조실록과 난중일기가 아닌 행록에만 등장하지만 이토록 전력이 기울어져 있으니 전략을 수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중신들은 당파를 불문하고 이미 수군에 대한 희망을 잃은 상태였다. [[윤두수]]는 전선이 남아있어도 수졸이 없어서 전선을 운영하기 힘들 테니 당분간은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수사들이 관할 해역을 방어하게 하자고 주장했고, [[류성룡]]은 남은 전선을 강화도로 모아 방어하자고 제안했는데 모두 하삼도 수운 방어를 포기한 행위였다.[* 윤두수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것이 싫어서 칠천량 해전 직후에 각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고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김경진(소설가)|김경진]]이 퍼트린 낭설일 따름이다. 실록에서 해당 기사를 전부 읽어보면 전혀 그런 맥락이 아니다. 왕도, 신하들도 수군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유효한 방어책을 논의하다 나온 의견 중 하나였을 뿐이다.] 물론 이건 사실상 국가를 버리는 엄청나게 멍청한 짓이었다. 조선은 지형적, 외세적 조건[* 한반도는 호남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토가 산지였으므로 도로공사를 하려면 큰 인력이 필요했으며 예부터 한반도를 침략한 외적은 주로 북방의 유목민족이었으므로 도로를 개설하는 데 대한 리스크도 높아 조선은 도로 건설에 열을 올리지 않고 수로를 주로 이용했다. 교통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한 2010년대 이후로도, '''[[만항재]]'''로 대표되는 강원도나 경북 지역 일부는 산지에 터널을 뚫지 않아서 그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야 하고 당연히 그만큼 교통사고도 많이 난다.]으로 강을 길로 삼아서 물자와 인원을 유통시켰고, 실제로 [[행주 대첩]]에서도 적절한 순간에 한강을 통한 보급이 들어와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당연히 육상전은 일본군이 바라는 일이었다. 만약 이순신이 지금까지 틀어막던 서해, 남해가 뚫리면 일본 수군을 이끌던 도도 다카도라, 가메이 고레노리, 구루시마 미치후사, 구키 요시다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적장들이 강화, 인천을 통해 한양으로 진격하여 선조를 잡고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수도 있었다. >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__'''今臣戰船 尙有十二'''__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__'''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__ >-----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충청도|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__'''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__ 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__'''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 원문 상에는 도적 적자가 없지만 주어를 넣어서 의미를 이해한다. 한문에서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기 때문.]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__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어쨌든 이러한 조정의 여론 동요를 이순신은 위의 유명한 어록으로 잠재웠다. 이순신 역시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고 해도 제해권이 있어야 왜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